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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후기

제목 성지순례 기행문(이스라엘, 요르단, 이태리)
작성자 이광호 작성일 2020-03-12 16:25:42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19:20-21/ 성지순례 기행문)
2020.2.16-27/ 요르단-이스라엘-이탈리아 이광호 목사(경주포석교회)
 
A. 첫째날(16-17, -)
신학생 시절부터 꿈꾸던 성지순례를 이제야 떠나게 되었다. 경주에서 인천공항까지 버스로 5시간, 인천공항에서 아부다비까지 11시간, 아부다비에서 암만공항까지 3시간..... 아부다비에서 환승을 하려고 3시간 기다린 것을 합하면, 20시간 이상 걸려서 요르단 암만에 도착하였다. 엄청난 시간이다. 20년을 기다려 온 성지순례인 만큼 알차게 보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암만 공항에서 요르단 가이드를 맡은 최모세 선교사를 만났다. 암만공항을 통과하자 마자, 기다리던 버스를 타고 요르단에 있는 기독교 마을로 갔다. 마다바에는 출애굽의 기록을 성전 바닥에 타일로 새긴 성조지 교회가 있었다. 동로마제국의 비잔틴 시대에는(주후 5-6세기) 성전을 건축할 때, 바닥에 타일로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그런데 성조지 교회에는 오래 전에 큰 지진으로 인하여 바닥 타일이 3/2정도만 남아 있었다. 원형이 온전하지는 않았지만, 굉장히 귀중한 자료라고 하였다. 이미 세계 각 나라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와 있었다. 요르단의 도시 분위기는 베트남과 비슷한 것 같았다. 생활수준이 열악해 보였다. 도로 옆 곳곳에 쓰레기가 널려 있다.
 
성조지 교회를 떠나서 모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느보산으로 올라갔다. 느보산은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최후를 맞이한 곳이다. 느보산에는 이전에 수도원이 있던 수도원 터 위에 모세기념교회를 지었다. 교회 내부로 들어가니까 과거 수도원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모세 기념교회 앞에는 전망대와 구리뱀 십자가가 있었다. 전망대에서 서쪽을 보면 사해 바다와 길갈 지역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 당시 모세가 가졌던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껴보았다. 성경에 모세는 시력도 좋았고, 건강하였다.”고 기록한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너는 여기까지, 그리고 다음 일은 여호수아에게라고 말씀하셨다. 한번의 혈기로 하나님은 모세를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다. 모세도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었겠지만, 하나님의 뜻에 쿨하게(?) 순종하였다. 그의 마지막이 너무나 아름다웠다고 생각한다.
 
요르단의 주변 환경을 보면 광야와 사막뿐이다. 성조지 교회와 느보산을 지나 호텔에 가는 길에 요르단의 그랜드 캐년이라 불리는 아르논 골짜기가 있었다. 매우 허름한 베두인 카페가 자리잡은 전망대에 내리니 아르논 골짜기가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랜드 캐년에는 비할 바가 아닌 듯하다. 보통 이곳은 해발 7-8백 고지인데, 우리 모두는 계곡의 웅장함에 감탄하고 있었다. 아르논 골짜기와 관련하여 나오미와 기론과 말론이 베들레헴의 가뭄과 기근을 피하여 온 곳이라 하였다. 다윗도 이곳 아르논 골짜기로 피신한 적이 있다고 하였다. 나오미가 두 아들을 데리고, 아얄론 골짜기 인근에 살았다. 낯선 이방지역에서 두 아들이 결혼을 했지만, 병으로 죽고 말았다. 결국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큰 며느리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작은 며느리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서 베들레헴으로 함께 돌아왔다. 나오미의 가족은 아르논 골짜기에 거주를 하면서도 그렇게 환경은 좋지 않아서 먹을 것을 쉽게 구하지 못하였을 것이라 하였다. 아르논 골짜기에서 북으로 한참을 달려 해가 떨어질 무럽, 모세의 샘물과 관련이 있다는 페트라 호텔에 도착하였다.
 
B. 둘째날(18, )
페트라 호텔을 떠나 에돔 족속의 땅이었던 페트라와 와디 럼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아침 일찍 7시 정도 출발하였는데, 주차장에 도착하니까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미 대형관광버스 수십대가 도착해 있었다. 페트라의 알 카즈네 신전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는데, 영국 BBC에서 죽기 전에 꼭 가야 할 세계인의 명소 3위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입구에 들어서니까 암벽이 얼마나 신기하고, 아름다운지 모두가 사진을 찍기에 바빴다. 그런데 페트라 입구인 시크 길에 들어서면서 평소 TV에서 보던 좁은 협곡이 나타났다. 그 길도 너무나 신기하고, 또 아름다웠다. 하나님의 창조 솜씨에 그저 감탄사만 연발할 뿐이었다. 바위를 깎아서 신전을 만들고, 주변에 마을을 형성하였다. 아브라함과 롯의 시대에 하나님께서 유황불로 소돔과 고모라성을 심판할 때, 롯의 가족은 소돔을 빠져나와 황급히 도망치는데, 처는 남겨둔 재산에 미련이 있었을까?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버렸다. 그 와중에 동굴로 도망쳐서 롯이 큰 딸과 동침하여 낳은 자손이 카락성의 모압이요, 둘째딸과 동침해 낳은 아들이 암만의 암몬이며, 후일 야곱의 형 에서가 세운 나라도 페트라의 모압이라고 하니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모압과 암몬도 유대인들과 같은 혈통인 셈이다.
 
페트라에서 약 3시간이 걸리는 와디 럼이라는 사막으로 출발하였다. 3시간 동안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차는 거의 막히지 않았다. 주변을 보면 대부분 황량한 사막과 바위뿐이었다. 이런 곳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까? 그런데 산 중턱에도, 산위에도 마을이 있었다. 성경과 관련하여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곳을 지나갔다고 하니, 참으로 알 수가 없었다. 와디럼에 도착하여 길을 가는데, 주변에 작은 돔형태의 텐트가 많았는데, 그것은 모두 비싼 호텔이라고 하였다. 일명 버블호텔..... 곳곳에 텐트와 작은 집이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머물면서 낮과 밤에 아름다운 경치를 본다고 하였다. 와디 럼은 낮에도 아름답지만, 특별히 밤에는 별들이 선명하게 잘 보인다고 한다. 와디 럼에서는 베두인 사람들이 운전하는 짚차로 사막을 2시간 횡단하는 짚차 투어가 있었다. 붉은 사막은 마치 무슨 외계의 행성 같았다. 주로 화성과 관련된 영화를 찍는 곳이 와디 럼이라고 하였다. 이곳에는 베두인 사람들이 짚차를 운전하며, 식당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베두인 족속은 사막의 유목민들인데, 아무 걱정없이 가족과 함께 낙천적으로 살고 있었다. 베두인 사람들은 요르단, 유대광야, 이집트 사막에 걸쳐 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다.
 
이번에 가이드로 나오신 분은 암만에서 13년 이상 선교사역을 하시는 최모세 선교사님이었다. 매우 성실하시고, 순수하신 분 같았다.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면서, 현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또한 현지법에 따라서 암만 현지인 가이드가 함께 왔는데, 23세의 여청년 다이애나였다. 우리 순례팀에 조금 연세가 많으신 장로님이 있었는데, 가이드인 다이애나가 정성껏 잘 모시고 다녔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못하는데, 얼마나 정성껏 모시고 다니는지 내가 감동을 받을 정도였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디나 인간적인 감동이 있는 것 같다. 와디 럼에서 다시 북으로 4시간 정도를 달려오니까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 도착하였다. 암만의 호텔은 대도시라서 그런지 어제 페트라의 호텔보다는 더 좋아 보인다. 버스를 타고, 계속 달려왔지만, 요르단의 들과 산에는 돌과 바위뿐이다. 이곳을 출애굽 백성들이 통과하였다고 하니, 광야 백성들의 갑갑함이 피부로 와 닿았다.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강도 없고, 물도 없고, 산에는 나무도 없었다. 광야백성들의 특징이 원망과 불평이라고 하는데, 현실적으로 공감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광야길은 3일만 있어도 힘들 것 같다. 높은 돌산에도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식수와 농사에 사용할 물은 어디서, 어떻게 구하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해답이 나오질 않는다.
 
C. 셋째날,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19, )
한국에서 들려온 소식으로 인하여 마음이 불편하고, 또한 무거워졌다. 대구·경북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무려 30명이 더 생겨났다는 소식이다. 안타깝다. 16일에 인천공항을 떠날 때, 31번까지였는데, 갑자기 두배 이상 늘어난 수치이다. 신천지 종교행사와 청도 대남병원에서 있었던 교주 이만희 형의 장례식에 사람들이 참석하였는데, 이 때문에 코로나가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청도의 장례식에 중국 우한에서 온 신천지 교인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을 하고 있다. 사이비 이단은 우리 사회를 좀 먹는 독버섯과 같다. 우리 사회에 몰래 암약하다가 이번에 코로나사태로 인하여 만천하에 그 정체를 드러낸 것이다. 오늘 아침에는 암만 호텔을 떠나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가기로 되어 있다. 요르단은 출애굽 백성들의 여정과 관련이 있다. 사막과 광야를 눈으로 보니 한편으로는 광야 백성들의 고통이 피부에 와 닿기도 한다. 사방을 둘러봐도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광야의 현실을 직접 돌아보았다. 이곳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으면 길이 없고, 방법이 없는 곳이다. 오늘 우리의 현실도 하늘을 보지 않으면 한순간도 살아 갈 수가 없음을 고백한다. 내 힘으로 안 되는 것이 많다.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은혜로 살아야 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국경, 알렌비 검문소를 넘어 이스라엘로 들어왔다.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경을 잇는 요단강의 다리가 알렌비 다리인데, 1945년 이스라엘의 건국을 도운 영국 장군의 이름을 딴 것이라 하였다. 아마 알렌비 장군이 아니었다면, 1945년에 이스라엘이 독립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알렌비 다리를 요르단에서는 킹후세인 다리라고 부른다. ㅎㅎㅎ) 어쨌든 건국의 단초를 제공한 알렌비나, 수천명의 유대인의 생명을 구한 쉰들러는 지금도 이스라엘에서 국가적 영웅으로 추앙을 받고 있다. 이곳 이스라엘은 성경의 역사, 예수님의 발자취가 숨 쉬는 곳이다. 이 자체로 가슴이 설레이고, 감동을 준다. 국경을 통과하니까, 이번에 경동노회 성지순례단의 가이드를 맡은 서영주 목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4일을 보내는데, 마지막날은 사밧예배 때문에 다른 분이 오기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하여튼 10년 이상을 이스라엘에서 살았으니, 경험이 풍부한 것 같다. 목사로서 이스라엘에 거처를 정하고, 공부를 하고, 또한 사역을 하고 있으니 굉장히 부러운 목사이다.
 
1)요단강 예수님 세례터, 사해체험
이스라엘에서 가장 먼저 요단강 예수님 세례터로 왔다. 수많은 사람들, 여러 나라에서 순례를 하고 있다. 한곳에서는 예배를 드리며 기도하는 순례팀도 있다. 이분들이야 말로 진정한 순례를 위하여 이곳을 찾은 듯하다. 최근에 비가 많이 와서 요단강 수위가 엄청 높아졌다고 한다. 서영주 목사도 최근 5년 동안에 요단강 수위가 이렇게 높아진 것은 처음 본다고 하였다. 요단강 세례터를 떠나 인근에 있는 사해로 향하였다. 사해는 수영이 아니라, 부영이라고 하였다. 소금물의 농도가 너무 진하여서 입이나, 눈에 들어가면 좋지 않아서 잠시 부영만 한다고 하였다. 몇 년 전, 인근의 휴게소에서 사해부영을 위한 장소를 만들었고, 사해부영을 마치면 인근의 휴게소에 반드시 들어가서 쇼핑을 하고, 점심을 먹어야 한다. 사해에 가니 날씨는 약간 흐렸지만, 부영을 하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사해로 들어가 부영을 하고, 자연산 사해머드를 바르고 한참을 떠다녔다. 피부에 좋다고 하니 모두가 머드를 듬뿍 바르고, 물에서 나오질 않았다. ㅎㅎㅎ
 
2)쿰란동굴, 엣세네 공동체 유적
사해부영을 끝내고, 엣세네파의 이야기와 사해 사본의 스토리를 간직한 쿰란으로 향하였다. 길을 가면서 이 지역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처음 도착한 길갈이라고 하였다. 저기 멀리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가 한눈에 들어왔다. 예루살렘에서 한참을 내려와야 하는 낮은 곳에 자리잡은 지형이었다. 예루살렘이 해발 일천 고지라면, 여리고는 해저 3백미터에 위치하고 있었다. , 해수면보다 낮은 곳으로, 여리고는 지면 보다 낮은 곳에 위치하였다. 여리고는 성경에서 종려나무의 성읍으로 기록한다. 그야말로 곳곳에 종려나무, 대추야자 나무가 있었다. 여리고 인근에 예루살렘을 떠나 의로운 제사장 그룹이 건설했던 유적이 눈에 들어왔다. 그 공동체를 건설한 사람들은 일명, 에세네파였다. 로마제국에 빌붙어서 아부하며, 권력을 유지하는 자들과 예루살렘을 떠나, 사해 인근의 광야에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엣세네파 공동체도 주후 70년 디도 장군에 의하여 예루살렘이 함락되어 존립이 위태로워졌고, 결국은 그들이 보존하려고 했던 성경사본을 쿰란의 동굴에 숨겨둔 채,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 이후로 엣세네 공동체는 천년 이상 땅속에 묻혀 있다가 양치기들에 의하여 마침내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쿰란 동굴은 1945년경, 성경연구의 획기적인 역사를 그은 쿰란사본이 발견된 곳이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성경연구에 가장 권위가 있는 사본은 레닌그라드 사본이었다. 하지만 쿰란동굴에서 성경사본이 발견이 되어 성경의 역사를 천년 이상 앞당겼다고 한다. 땅속에 숨겨져 있던 성경사본들을 양치기들이 우연히 발견하였다. 양치기들은 오래 된 사본을 수십달러에 골동품 수집가에게 팔았고, 골동품 수집가들은 그 가치를 알았다. 그들은 박물관에 수만달러를 받고 팔았다.(항상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 ㅎㅎㅎ) 어쨌든 엣세네 공동체가 남쪽의 마사다로 피난을 하면서 숨겼던 사본들은 주후 70년 경에 파괴되어, 땅속에 묻혀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1945년 이후로 속속 발견이 되었고, 성서학 연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12번 동굴이 마지막) 지금도 엣세네 공동체의 거주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해가 내려 다 보이는 언덕이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의롭고, 완전한 하나님 나라였다. 사두개파, 바리새파, 열심당, 엣세네파와 같은 정파들이 각각의 비전과 이상을 품고 독립과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꿈꾸며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로마제국에 의해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3)유대광야, 여리고
쿰란동굴을 떠나 유대광야로 향하였다. 해발 7-8백 고지를 올라오니 황량한 광야가 눈앞에 펼쳐진다. 광야는 미다바르... 말씀으로부터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 하나님을 바라보는 곳이 광야이다. 성경의 모든 선지자들도 대부분 광야에서 메시지를 받았다. 광야에서 순례단이 손을 들고,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였다. 순례여행, 한국교회와 코로나사태의 해결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다. 유대광야에서 산위를 바라보면 예루살렘이 보인다고 하였다. 그리고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로 향하였다. 여리고는 사해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다. 여리고에 들어가니까 여호수아 당시에 무너진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대규모로 발굴이 되어, 성벽 사이로 길을 만들어 놓았다. 고고학적 발견으로 성벽이 안에서 밖으로 무너진 것이 그대로 드러났다. 여리고에 가니 삭개오가 올라간 뽕나무가 있었다. 처음 한국어 성경에 뽕나무로 번역이 되었는데, 원어에는 돌무화과나무이다. 한문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던 중에 일어난 번역상의 오해이다. 헬라어 원어로 쉬코모레아인데, 이 단어는 무화과나무와 검은 뽕나무의 합성어이다. 그런데 최초의 번역가들은 이스라엘의 자연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우리의 상황에 맞추어 뽕나무로 번역을 하였다. 그렇지만 현재 개역개정판에는 돌무화과나무로 변역이 되어있다. 이 나무는 우리나라의 돌배와 같이 야생의 무화과 열매가 맺히는 돌무화과나무이다. 삭개오가 올라간 나무(돌무화과나무)를 보니, 그 나무위에 올라간 삭개오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였다.
 
삭개오의 나무 바로 옆에는 엘리사의 샘물이 있었다. 왕하2:15-19절 이하에 보면 여리고 성읍에 선지학교가 있어서 엘리사와 엘리야가 자주 이곳을 방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여리고는 성읍이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여 과일의 열매가 좋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사정을 들은 엘리사가 물샘에 소금을 넣어 물을 고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은 이 샘을 엘리사의 샘물이라 불렀다. 이 샘은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마셨다. 예수님 역시 갈릴리에서 여리고를 지나갈 때, 이 샘물을 마셨을 것이다. 지금은 샘물에 건물을 지어 상수원으로 잘 보존하고 있었다. 물이 귀한 여리고의 상수원의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니 샘물이 바닥에서 펑펑 솟아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어디를 가나 물이 귀한 지역이다. 물을 차지하고, 관리하는 게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엘리사의 샘물 건너편에는 여리고 성벽터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 여리고에 사는 사람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팔레스틴 사람들이라 하였다. 여리고는 현재 6개 팔레스틴 자치구 중에 하나이며, 이곳에는 유대인들이 들어올 수 없다고 하였다. 사실 외국인인 내가 보기에는 팔레스틴 사람이나, 유대인들의 식별이 쉽지가 않았다. 모두가 한 족속인데, 왜 이리 땅을 두고 선을 긋고, 다투고, 싸우는 것일까? 주님이 오셔야 해결될 인인 듯하다. 여리고를 떠나 예수님이 시험당하신 시험산으로 향하였다. 다시 시험산을 뒤로 하고, 예수님의 주요한 사역의 무대인 갈릴리로 향하였다.
 
D. 넷째날(20, )
아침에 눈을 뜨니 아름다운 갈릴리 호수가 눈앞에 펼쳐진다. 호텔이 경사진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침식사를 하러 레스토랑에 올라가니 갈릴리 호수의 일출광경이 펼쳐진다. 너무나 감동적이다. 식당에 수많은 인종이 섞여서 함께 식사를 한다. 여기 성지에는 전 세계에서 모인 순례객들이 모여든다. 요르단과 이스라엘은 분위기도 다르고, 순례객들도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이스라엘에는 성지순례를 온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이른 새벽부터 한국에서 들려온 소식은 너무나 안타갑기만 하다. 대구·경북은 완전히 비상인 듯하다. 31번 확진자가 신천지 신도인데,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전국을 돌아다니는 바람에 130명에게 바이러스를 퍼트렸다는 것이다. 대구 신천지, 다대오지파가 공공의 적으로 지탄을 받고 있다. 사이비이단은 언제나 사회를 좀 먹는 독버섯이다.
 
오늘은 북부갈릴리 지역을 돌아볼 계획이다. 갈릴리 북부는 지금도 이스라엘이 시리아와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골란고원이 자리잡고 있다. 갈릴리 북부지역은 6일전쟁 당시에 이스라엘에 시리아로부터 빼앗은 땅이다. 골란 고원은 일조량도 많고, 땅도 비옥하여 사과와 같은 과일이 잘 되는 곳이다. 그런데 지금도 시리아가 계속 땅을 돌려달라고 하여, 이스라엘의 입장이 곤란하여 골란 고원이 되었다고 아재 개그도 하신다. ㅎㅎㅎ (6일 전쟁 당시 이스라엘 스파이 헨리 코헨의 스토리도 들었다. 그는 정통 유대인으로 제사장 가문의 아들이다. 코헨이라는 이름은 제사장 가문임을 의미한다. 갈릴리 북부지역에 호주에 서식하는 유칼리투스라는 나무가 많았다. 6일 전쟁 당시에 코헨의 계략으로 심은 나무라고 하였다. 코헨이 시리아에 스파이로 잠입하여 그늘을 만들려면 유칼리투스라는 나무를 많이 심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늘이 생겨 시리아 군인들이 좋아하였지만, 사실은 전쟁이 일어나자 모두 공중폭격을 받고 말았다. 코헨은 결국 시리아에 체포되어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1)텔단
갈릴리 북부지역은 헬몬산 아래의 지역인데, 갈릴리호수의 수원지가 있다. 갈릴리 호수의 발원지인 셈이다. 갈릴리지역은 요르단에서 보던 광경과는 너무나 달랐다. 요르단은 그야말로 사막과 바위뿐이었다. 광야백성들이 그런 곳에서 40년 동안 훈련을 받았는데, 그야말로 혹독한 훈련을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번에 성지 순례를 하면서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는데, 약간 느낌이 오는 듯하였다. 요단 동편의 모압과 암몬족속의 땅은 사실 사람이 살만한 곳은 아닌 듯하다. 그런 곳에서 갈릴리 호수와 비옥한 땅을 본다면 충분히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갈릴리 호수의 샘근원은 그야말로 물이 넘쳐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의미는 인간의 생존, 인간의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리라. 북부갈릴리를 돌아보면서 가장 먼저 간 곳이 텔단의 샘근원이었다. 물이 1초에 7천 리터가 솟아난다고 하였다. 갈릴리 호수 인근은 땅도 비옥하여 농작물이나, 과일도 잘 될 뿐만 아니라, 주변에 마을도 많았다.
 
성경은 헬몬산의 만년설이 녹아서 갈릴리에 흘러들어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명수가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갈릴리 샘물의 근원은 헬몬산과는 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어쨌든 갈릴리호수의 발원지는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샘물이 끊임없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호수의 샘근원을 지나, 여로보암과 관련이 있는 텔단에 도착하였다. 텔단은 북이스라엘의 1대왕 여로보암이 북쪽의 사람들이 남쪽의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도록 지은 두 개의 제단 가운데 하나이다. 여로보암은 벧엘과 단에 제단을 세우고, 북쪽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런데 이일이 그의 족쇄가 되어, 대명사처럼 쓰이게 되었다. 왕의 명령을 거역한 반역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막은 비신앙적 행위였다는 것이다. 영적인 정통성도 상실하고 말았다. 거역과 불순종은 여로보암의 길로 지칭되었다. 한순간의 결정이 후대에 지울 수 없는 불명예를 남기고 말았다.
 
그리고 텔단과 관련하여 단지파의 이야기가 나왔다. 단지파를 한민족의 조상이라고 주장하는 가설이 있는데,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일축하였다. 사실 처음에 단지파는 중부지역의 땅을 분배받았는데, 블레셋이 워낙 강하여 그곳에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18:29, 19:47) 실제 원문을 보면 단지파가 북쪽으로 올라갔다.’는 것인데, 일부 사람들이 단지파가 사라졌다.’고 해석을 하는 바람에 생겨난 오해라고 하였다. 단지파가 북쪽으로 이동하여 맑은 물이 흐르는 텔단에 거주를 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하였다. ‘단지파가 거주하였던 지역의 샘이 가장 컸다.’는 성경의 기록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번에 서영주 목사가 경동노회 훈련원 성지순례단 가이드를 맡았는데, 본인이 시무하는 경주포석교회 권사님의 막내아들이기도 하다. 서영주 목사는 이스라엘에 10년 이상 거주한, 베테랑 성지전문가인 듯하다. 앞으로 이스라엘에서의 사역이 기대되는 목사이다. 모두가 어렵다는 이스라엘 장기비자도 받아서, 장차 훌륭한 성지전문가로 성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 다섯째날(21, )
오늘도 갈릴리 호텔이다. 아침에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데, 어제 보았던 갈릴리 일출이 또 다시 나타났다. 정말 아름다운 일출광경이다. 예수님이 주로 활동하신 갈릴리 지역을 방문하여 이틀이나 머물게 되었다. 사실 이번 성지순례일정에서 예루살렘에 하루 더 머물렀으면 하는 바램도 있었다.(그러나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와서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생각해 보니 이스라엘에서 빨리 나온 것은 천만 다행이었다. 하루라도 더 늦었다면 남은 일정이 모두 취소 될 뻔하였다.) 어쨌든 오늘은 갈릴리를 출발하여 아래 남쪽으로 내려간다. 정말 가는 곳곳마다 성경의 유적이고, 예수님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1)갈멜산(엘리야와 불의 제단)
갈릴리를 떠나 불의 선지자 엘리야의 이야기가 남아있는 갈멜산에 도착하였다. 산 아래로 기손강이 흐르고 있었다. 갈멜산은 거룩한 머리산이라 부른다. 원래 종교적 의미가 강한 산인데, 바알 종교의 중심지였다. 이미 주차장에 수십대의 버스가 와있었다. 마당에 올라가니 칼을 든 엘리야의 조각상에 높게 세워져 있었다. 엘리야 기념교회 옥상의 전망대에 올라가니 역시 사방이 모두 보였다. 갈멜산은 해발 6백의 고지인데, 멀리 지중해의 바다도 눈에 보였다. 엘리야의 종이 멀리 지중해에서 주먹 만한 구름이 오는 것을 보고, 큰 구름이 몰려와 비가 올 것을 알았다. 36개월 만에 온 대지를 적시는 비가 내렸는데, 엘리야의 기도가 응답이 된 것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이 가장 번창하였던 예수님 당시에 제사장 숫자가 480명 정도였는데, 이보다 훨씬 오래 전 엘리야 시대에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가 850명이었다는 사실은 바알과 이방종교가 얼마나 극성을 부렸고, 또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는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갈멜산은 엘리야 이후로 무흐라카, 불의 제단이라 불렀다. 엘리야는 850명이나 되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맞대결을 통하여 참 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입증하였다.(왕상18:1-40) 영국의 신학자 로울리는 모세없이 여호와의 종교가 태어나지 못하였으며, 엘리야가 없었다면 여호와의 종교는 죽고 말았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엘리야 시대에 그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을 겸하여 섬겼다. 그것이 문제이다. 하나님과 잡신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다. 세상과 짝하여 하나님을 섬길 수는 없다. 고리를 끊고, 정결하게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야 한다. 갈멜산은 혼합종교의 어리석음과 실패를 가르쳐 준다.
 
2)갈릴리 가나(혼인잔치 기념교회/물항아리), 나사렛(수태고지 기념교회)
갈멜산을 뒤로 하고, 갈릴리 가나로 갔다. 물이 포도주로 바뀐 곳이다. 그동안은 성경의 기록만 보았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여섯 항아리 중에 하나를 직접 보았다. 오래 전, 실제로 항아리가 발견되어 수많은 순례객들이 찾아오고 있었다. 항아리는 사람의 키 정도로 굉장히 컸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여섯 개의 항아리를 채우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잔치가 끝났는데, 또 다시 항아리를 채워야 했다. 이것은 순종위의 순종, 완전한 순종이었다.
 
예수님 당시에 가나는 직할시이고, 나사렛은 작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다. 가나는 작은 마을인데 비하여, 갈릴리는 엄청나게 유명한 동네가 되어 있었다. 갈릴리는 예수님이 성장한 곳이며, 주요한 활동무대였다. 갈릴리 나사렛은 예수님 때문에 복 받은 동네가 되었다. 갈릴리 가나에서 나사렛의 수태고지 교회로 이동하였다. 수태고지, 말뜻은 마리아에게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잉태를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천주교는 마리아를 굉장히 추앙하고 있어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던 그 자리에 엄청난 크기의 성당을 건축하였다. 지금도 천주교에서 정책적으로 지원을 하는 교회라고 하였다. 아마도 이스라엘 내에서 가장 큰 성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규모가 굉장히 컸다. 그리고 예수님의 직업이 목수였는데, 실제로 나사렛에는 나무보다 돌이 더 많았다. 예수님은 나무와 돌을 같이 다루던 고급기술자였다고 하였다. 종합 건축업자라고 할까? 성지에 와보니 성경에 있는 내용이 더 분명해지고, 선명하게 이해되는 것 같다.
 
나사렛은 요셉과 마리아가 살던 작은 동네였다. 최초에 지었던 마리아 수태고지 기념교회는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왕후가 주후 326년 성지순례를 한 이후에 건축하였다고 한다. 이번에 성지순례를 하면서 알게 된 것은 헬레나 왕후가 로마의 복잡한 정치적 혼란을 피하여 성지순례를 최초로 시작하였고, 순례객들을 위하여 예수님의 발자취가 남아 있던 곳에 기념교회를 여러 곳 건축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로마에서 이스라엘까지 가까운 거리도 아니지만,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기념교회를 세웠다고 하니 헬레나 왕후의 신앙심이 굉장히 돈독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헬레나 왕후는 아들을 회개시켰고,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하는데 큰 기여를 한 분이었다. 수태고지 기념교회를 건축한 인물이 갈릴리 호수 인근의 팔복교회를 건축한 인물과 동일한 이태리의 건축가라고 하였다. 요셉기념교회도 있었다. 요셉의 집과 마리아의 집은 약 3-4백미터 정도였다. 한동네에 사는 갑돌이와 갑순이의 아름다운 사랑이었다고나 할까? 마리아기념교회와는 그 규모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았으나, 요셉의 집터에도 기념교회를 세워 순례객들을 맞고 있었다.
 
3)므깃도(전략적 요충지)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내려가는 길에 므깃도를 돌아보았다. 므깃도는 사방이 훤하게 보이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알렌비 장군도 이곳에 진을 치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였다고 한다. 므깃도의 전망대에 서니 아래로 이스르엘 평원이 펼쳐져 있고, 저기 반대편으로 중요한 산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사렛을 중심으로 좌로부터 다볼산, 모래산, 길보아산이 오른쪽으로 이어져 있다.(다볼산은 어느 곳에서나 다 보인다고 하여 다볼산이라.’ 부른다는 아재 개그도 작렬한다. ㅋㅋㅋ) 실제로 다볼산은 예수님이 올라가셔서 변화되셨다는 변화산으로 추정을 하고 있다. 다볼산과 길보아산 중간지점에 모래산이 있었다. 길보아산은 사울과 요나단이 최후를 맞이한 곳이다.(대상10:1-14) 사울은 전쟁에서의 패배와 가문의 몰락에 머물지 않고, 자신과 아들의 시신이 벧산 성벽에 매달리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이스라엘이라는 땅 자체가 유럽, 아프리나, 아시아를 잇는 길목인데, 그야말로 므깃도는 전쟁이 나면 반드시 차지해야 하는 전략적 요충지 중에 요충지인 셈이다. 므깃도에는 고대 왕궁이나, 군사시설의 유적발굴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었다.
 
4)가이사랴(욥바)
지중해 해안에 건설된 전형적인 로마의 도시이며, 계획도시이다. 인구는 약 10만 정도였고, 로마 총독의 관저가 있어서, 로마군대 1레기온, 1만명이 주둔하던 총독의 직할도시였다. 가이사랴는 11세기 십자군 전쟁 당시에 지은 성들과 유적도 많았다. 이곳이 순례객들에게 유명해진 것은 헤롯 아그립바가 세운 빌라도의 비석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적으로 빌라도가 실존 인물임이 밝혀진 것이다. 물론 원본은 히브리대학 박물관에 있고, 여기에 세워진 것은 모조품이라 하였다. 그리고 가이사랴(욥바)는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로마로 압송되기 전에 2년을 머물던 곳이다. 유대인 40명의 결사대를 피하여 로마의 군대가 주둔하던 가이사랴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가이사랴는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와 베드로와 만남이 있던 곳이다.(10, 욥바) 이 사건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만남인데, 큰 의미가 있는 만남이었다. 이방인과 유대인의 차별과 장벽이 무너진 획기적인 장소이다. 정통 유대인이었던 베드로는 이방인이 부정하여 만나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으나, 보자기환상을 통하여 자신의 고정관념이 틀렸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성령님에게 이끌리어 갈릴리에서 멀리 욥바까지 와서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갔다. 그들과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던 중에 성령님이 임하시고, 방언이 터지는 일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서로가 화해하고, 하나가 되는 것이 복음의 역사이다. 그런데 세상의 역사는 반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
 
해가 넘어갈 때가 되어 예루살렘을 지나, 베들레헴에 도착하였다. 베들레헴은 팔레스타인 자치구인데, 무슬림지역이다. 베들레헴에서는 주차빌딩에 버스를 세우고, 언덕을 올라 예수탄생교회로 갔다. 예수님 탄생 기념교회는 베들레헴의 말구유위에 세워진 교회이다. 당연히 말구유는 돌로 된 것이다. 예수탄생교회 인근에 천주교회가 지은 성당이 있었고, 그곳에는 제롬이 라틴어성경을 번역한 곳이 있다고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가지를 못하였다. 예수 탄생 기념교회의 입구는 허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는 낮은 문인데, 일명 겸손의 문이다. 원래는 큰 문이었는데, 나중에 어떤 왕이나, 장군도 어리를 숙여서 들어가도록 입구의 문을 낮게 바꾸었다고 한다. 예수님 앞에서 그 어떤 사람도 고개를 숙여야 한다.
 
F. 여섯째날, 예루살렘 순례(22, )
오늘은 이스라엘에서 마지막 날이다. 이스라엘에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최근 한국 언론이 성지순례단을 비난하는 모양이다. 성지순례를 다녀온 안동과 의성의 천주교 순례팀 중에서 확진자가 여러 명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이 걸려서 들어온 것이지, 이스라엘에서 묻어나간 것은 결코 아니다. 세상이 뒤숭숭하니 희생양을 잡으려 한다. 애초에 신천지라는 사이비이단이 퍼트린 게 문제이다. 그런데 이제는 엉뚱하게 성지순례를 문제삼고 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청정국인 이스라엘이 순례단의 입국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순례중인 1,300여명의 한국순례팀 일부를 자국의 전세기를 동원하여 한국으로 귀국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국의 상황이 점점 악화되고 있어서 안타깝다.
 
아침에 헤브론 도로, 일명 60번 도로를 따라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였다. 베들레헴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면서 유대인들이 세운 거대한 분리장벽을 볼 수가 있었다. 베들레헴을 모두 분리장벽으로 막아놓은 형세였다. 복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함에도 계속 분리가 되고, 차별이 일어나고 있으니 세상의 역사는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베들레헴도 6개의 팔레스타인 자치구 중에 하나였다. 60번 도로는 고대에 족장들이 다니던 족장들의 도로라고 한다. 먼저 언덕으로 올라가서 감람산으로 갔다. 사실 이번 예루살렘에서의 일정은 오전만 있어서 굉장히 아쉬웠다. 1박을 하면서 약간은 여유를 가지고 돌아보아야 하지만, 오전 시간밖에 없어서 매우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예루살렘은 전 세계 기독교와 관련된 4개 종파, 또한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관심이 집중된 곳이다. 저마다 좋은 곳을 선점하려고, 경쟁을 벌이고 있다. 감람산 전망이 좋은 곳에서 반대편을 보니 옛적 솔로몬 성전터에 이슬람사원인 오마르 사원이 세워져 있다.
 
오마르 사원은 이슬람이 세력을 확장하던 주후 7세기에 최초로 세워졌다고 한다. 반대편에서 이슬람 사원인 오마르 사원의 황금돔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아쉽기도 하였다. 솔로몬 성전터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 했던 모리아산 인데, 지금은 무슬림이 차지를 하고 있다. 그들은 이삭이 아니라, 이스마엘을 바쳤다고 주장을 한다. 역사적으로 11세기에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성지를 회복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것도 잘 되지 않았던 것 같다. 16세기 이후로 솔로몬 성전터는 또 다시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이 차지하게 되었다. 아쉬운 일이지만, 현재 이스라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였다. 새로운 곳에 솔로몬의 성전과 같은 동일한 성전을 건축할 계획이 있다고 하였다. 감람산에서 걷고, 또 걷고, 계속 걸었다. 성지 순례를 하려면 체력도 좋아야 한다. 신발도 편안해야 순례를 잘 할 수 있다. 예루살렘과 로마는 하루 종일 걸어야 하는 코스이다. 예루살렘이나, 로마는 주차장 사정이 좋지 않아서, 걸어서 이동하도록 동선이 이어져 있다.
 
1)감람산(눈물교회, 만민교회)
감람산에 예수님이 눈물을 흘리신 곳에 눈물교회가 있고, 그 옆에 밤새 기도하셨던 자리에 만민교회가 세워져 있다. 만민교회가 세워진 곳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미래를 보며 눈물을 흘리셨다고 한다. 만민교회 옆에는 천년 이상 된 감람나무 여덟 그루가 있다고 한다. 일부 학자들은 2천년이 되었다고 주장을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천년 정도로 추정을 하고 있다. 어쨌든 감람나무가 오래된 것은 분명하였다. 물론 예수님이 그 나무 아래에서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를 했다고 주장하는 감람나무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감람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셨다. 인류의 미래와 십자가를 지시는 순간에 이 잔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게 해 달라.’며 인간적인 고뇌를 하셨다.
 
2)비아 돌로로사(십자가의 길, 성무덤교회)
감람산을 지나서 예루살렘 성전 미문을 통과하여 십자가의 길, 일명 비아 돌로로사로 갔다. 고난의 길인데, 주위에 아랍사람들의 기념품 가게가 있어서 십자가를 묵상하는 데는 그렇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예수님이 사형판결을 받으시고, 곧바로 70kg이나 되는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셔야 했다. 비아 롤로로사, 고난의 길을 올라가시면서 곳곳에 쓰러지고, 기대셨는데 14지점에 청동조각으로 표시를 하여 순례객들이 명상을 하도록 도와주었다. 중간지점에는 십자가를 지도록 체험하는 곳도 있었다. 골고다 언덕에 예수님이 처형된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주위에 14각이 있는 원형의 표지석이 있었다. 14라는 숫자는 족보와 관련이 있다고 하였다. 골고다 언덕에는 역시 기념교회인 성무덤교회가 세워져 있었는데, 6개 종단에서 관리를 하고 있었다. 비아 돌로로사, 십자가의 길이 끝나는 지점이 성무덤교회였고, 교회안에는 11-14지점이 있었다. 이미 수많은 순례객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지점에 도착하여 잠시 묵상을 하고, 내려왔다. 내려오는 지점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염을 했다는 넓은 돌이 있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거기서 조금 돌아 나오니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무덤자리가 있었다. 처형된 곳에서 얼마되지 않는 곳에 14지점, 무덤이 있었다. 거대한 기념교회안에 무덤과 부활을 기념하는 자리가 있었다. 베들레헴이나, 예루살렘에는 예수님의 발자취와 흔적이 곳곳에 있다. 예수님의 흔적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표지석이 있었고, 대부분 기념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전 세계에서 수많은 순례객들이 모여 예수님의 발자취와 흔적을 따라가며 묵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걷다보면 주변에 성벽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모두 궁금하여 질문을 한다. 지금 남아 있는 성벽은 16세기에 오스만 투르크의 슐레이만 대제가 원래 성벽보다 더 넓게 확장하여 쌓은 것이라 하였다.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된 예루살렘 성보다는 훨신 더 넓은 성벽이 지금 남아 있는 것이다. 과거에 쌓은 것은 통곡의 벽, 60m만 남아 있다.
 
3)통곡의 벽...
주후 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성전을 파괴하면서 성벽일부를 남겨두었다. 표지판을 보니 서쪽에 60m정도가 남아 있다고 하였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디도 장군이 서쪽의 60미터는 파괴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대인들이 이 성벽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한다고 하여 통곡의 벽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통곡의 벽으로 가는데, 오늘은 안식일이니 사진을 찍지 말라고 여군이 제지를 하는데, 유대인들은 모두가 찍고 있어서, 나도 자신있게 사진을 찍었다. 통곡의 벽에는 남녀가 따로 들어가도록 구분이 되어 있었다. 통곡의 벽에서 역시 우리 순례팀은 한국의 코로나사태가 해결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를 하였다. 이번 성지순례는 가는 곳마다 간절히 기도를 한 것 같다.
 
4)마가의 다락방....
통곡의 벽에서 덩게이트(일명 쓰레기를 버리는 문)를 나와서 20분 정도 오르막길을 올라가니 마가의 다락방이 있었다. 마가의 다락방 밑에는 다윗의 가묘도 있어서 잠시 둘러보았다. 역시 현장에 가보니 다락방이 아니라, 굉장히 커다란 2층방이었다. 그렇지만 120명이 들어가기에는 약간을 좁아 보였다. 그러니까 다락방이라기보다는 2층의 넓은 방이었다. 마가의 다락방도 비잔틴 시대에 건축을 하였는데, 기둥에는 자신의 심장을 쪼아서 새끼에게 먹인다는 펠리칸이 새겨져 있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묵상하게 하였다.
 
오후에 벤 구리온 공항에 도착하여, 로마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이륙한지 약 4시간 만에 로마공항에 도착하였다. 로마에 오니 몇몇 사람들이 마스크를 하고 다닌다. 아직은 그렇다할 상황은 아닌데, 자꾸 한국에서 전화를 하여 우리 순례팀이 괜찮으냐?’고 묻는다. 오히려 우리는 한국이 더 걱정인데 말이다. 뉴스를 보니, 우리가 예루살렘을 떠나온 다음 날에 이스라엘 관광청이 한국인들의 이스라엘 입국금지, 이스라엘에 체류중인 사람들은 14일 호텔 격리를 한다고 발표하였다. 이래 되니 한국에 가서도 시선이 따가울 것 같다.
 
5)로마도착(22, 토요일 저녁)
이번 성지순례의 마지막이 될 로마공항에 도착하였다.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무슨 영화제목 같다. 사도 바울의 마지막 전도여행의 코스이다. 우리는 비행기로 4시간만에 날아왔지만,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 가이사랴에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는데, 오랜 시간이 걸려 겨우 도착하였을 것이다. 이곳 로마는 나의 음대시절에 꿈꾸던 도시이다. 이번에 성지순례길에 로마에 오게 되었다. 감회가 새롭다. 대학 다닐 때 한번이라도 오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방학 때, 한 두 달 공부를 하고 오던 친구들도 있었다. 성악은 평생에 과제이기도 하다. 지금도 성악의 발전을 위하여 계속 연습을 하고 있다.
 
G. 일곱째날, 폼페이, 나폴리, 소렌토(23, )
나폴리는 멈추어진 정오의 시간이다. 태양이 뜨겁게 작렬하는 지중해 지역이다. 로마에서 나폴리로 가는 중에 로마제국시대에 만든 아피아 가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희한하게도 아피아 가도 양쪽으로 로마의 소나무가 심겨져 있었다. 로마의 소나무는 우리나라의 소나무와 품종은 다르지만, 아름답게 잘 가꾼 것 같다. 일설에 행군하던 군인들이 쉬도록 그늘을 만들려고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모든 것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는 주전 312년부터 아피아가도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대부분 식민지와 로마를 도로로 연결하였다고 한다. 나폴리에서 폼페이로 가던 중에 아피아 가도를 보면서 이 길이 베드로와 바울을 압송하던 길이라고 하였다. 주전 60년부터 로마가 건설한 폼페이는 주후 79년 베수비오 산의 화산 폭발로 16시간 만에 2천명의 주민과 함께 땅속에 묻혀버린 비극의 도시이다. 폼페이는 오랫 동안 땅속에 묻혀 있다가, 18세기 중반에 발굴이 되었다.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녀가는 곳인데, 로마제국의 건축술과 뛰어난 도시계획의 흔적을 볼 수가 있었다. 폼페이를 둘러보고, 인근에 있던 소렌토를 멀리서 관망하고 로마로 다시 돌아왔다.
 
H. 여덟 번째 날, 로마순례(24, 주일)
주일이라서 아침 6시에 성찬예배로 드렸다. 성지순례와 한국의 코로나 사태가 해결이 되기를 합심으로 기도하였다. 이번 성지순례는 간절한 마음으로 함께 기도한 것 같다. 예배를 드리고, 바티칸으로 갔다. 바티칸으로 가니 벌써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발디딜 틈이 없었다. 여기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큰 일이 나니, 서로가 조심하라고 한다. 이 와중에 소매치기도 기승을 부리니 귀중품을 잘 보관하라고 한다. 로마는 오래된 도시이다. 로마는 자체가 박물관이다.(Rome was not built in a day!) 바티칸과 베드로 대성당은 연결이 되어 있다. 바티칸은 입장료가 10유로인데, 관람객이 하루에 1만명이 다녀간다고 한다. 주말에는 3만명이라고 하였다. 면죄부를 팔아서 건축비를 충당했지만, 후손들은 입장료로 그때 면죄부로 뜯은 돈의 본전은 뽑고도 남은 것 같다. 로마시대 곳곳에 오래된 건축물이 남아 있다. 그것도 멀쩡한 건물이 많다. 로마제국 시대에 건축한 것이 아직도 멀쩡하니, 그들의 건축기술은 매우 뛰어난 것 같다. 로마에 와보니 소나무를 아주 잘 가꾸어 놓았다. 아름다운 소나무가 로마 시내에 많이 있었으며, 중요한 건물에는 어김없이 잘 가꾸어진 소나무가 있었다. 로마에서 소나무도 아름다운 나무임을 알게 되었다. 평범한 것이 아름답다.
 
이태리의 여러 도시를 안내한 로마의 가이드는 윤명환 집사님이었는데, 이태리에서 21년을 거주하였다고 하였다. 경남 거창 출신으로 성악을 전공하였고, 이태리에 유학을 왔다가 힘든 가운데, 가이드로 정착을 하였다고 한다. 어딜 가도 길은 있고, 살아갈 방법은 있나 보다. 현재 예루살렘과 로마에는 가이드가 부족한 실정인데, 가이드도 잘만 하면 괜찮은 직업이라고 하였다. 밖에서 보면 가이드가 힘든 것 같은데, 사실 가이드는 3-4개월만 제대로 일을 하면 1년 연봉이 들어온다고 하였다. 일단은 여행사와 계약이 되어 있고, 순례팀의 팁이 들어오며, 또한 현지의 유명 특산품 판매를 통하여 약간의 수입이 있다고 하였다. 요르단이나, 이스라엘에서는 선교사님들이 가이드를 하여 상품에 대한 소개가 별로 없었다. ‘어디에 가면 뭐가 좋다.’는 식으로 간단하게 소개를 하였다. 그런데 로마에서는 유명한 이태리 특산품이 많아서 자세히 소개를 해 주었는데, 나도 귀가 솔깃해졌다. ㅎㅎㅎ 어쨌든 로마 가이드 윤명환 집사는 성악을 전공하여 나폴리, 소렌토에 갔을 때 이태리 가곡을 여러 곡 불러 주어서, 잠이 달아났고, 순례팀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버스를 타고 가던 중에 가이드 윤집사님이 로마의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를 해 주었다. 그 중에서 로마가 세계를 정복한 것이 다섯 가지가 있다고 하여 적어보았다.
1)로마제국의 정치·군사적인 세계정복의 시대가 있었다.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는 3개 대륙의 넓은 지역을 정복하여 다스렸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로마인들은 땅을 정복하면, 도로부터 닦았다. 로마인들은 체계적인 법률과 군사제도로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식민지에는 총독을 파견하여 넓은 제국을 잘 통치하였다.
2)종교적 정복이다. 종교하면 유대인들을 생각할 수 있는데, 로마는 천주교의 중심인 바티칸이 자리잡고 있다. 교황이 로마에 있어서 전 세계 수억명의 천주교인들의 지지와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3)음악적 정복이다. 이태리에서는 성악이 고도로 발달하였는데, 인체구조도 노래하기에 좋은 구조이지만, 특별히 언어가 발음하기에 편리하다. 독일어와 프랑스어에 비하여 이태리어는 라틴어 계통으로 노래를 부르기가 매우 쉽다고 한다. 오늘 날 세계에서 연주되는 성악곡과 오페라의 70%는 이태리 작곡가들이 만든 것이다.
4)패션과 의상의 정복이다. 이태리 사람들은 어떤 지역보다 패션감각이 뛰어나다. 밀라노가 그 중심에 있다. 가죽과 섬유공업이 발달하였으며, 한 가지 일에 30년 이상 종사한 장인들이 값비싼 브랜드를 만들어 낸 나라가 이태리이다.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브랜드는 이태리 것이 많다. 아르마니, 프라다, 베네통, 구찌, 페라가모, 샤넬. 베르사체, 콜롬보.....
5)음식과 요리의 정복이다. 이태리는 면요리가 발달하였다. 면은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배워왔지만, 파스타는 이태리에서 발전하였다. 밀가루 반죽을 베이스로 하는 피자도 이태리에서 발전하였다. 요리와 음식으로 세계를 정복하였다. 어쨌든 로마가 제국을 확장하고, 예술과 문화를 발전시켰으나 사치와 향략, 퇴폐문화로 인하여 속은 곪아 터질대로 터지고 있었다. 로마의 황제 78명중에서 60명이 암살을 당하거나, 비참하게 생애를 마감하였다. 화려한 역사의 이면에 황제의 불안과 불행이 있었다니 놀랍기도 하다. 그러한 암울한 시기의 말에 콘스탄틴이 나타나서 주후 313년 기독교를 로마의 종교로 공인을 해주었으니, 이것도 역사의 아니러니인 듯하다. 주후 392년 데오도시우스는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였다.
 
I. 아홉번째 날, 피렌체(25, )
이태리 북부에서 코로나가 발생하여 북부에 있는 밀라노의 통행이 차단되었다. 그래서 피렌체에서 좀 더 오래 머물게 되었다. 피렌체는 중세 이탈리아의 상공인들이 모여서 만든 상공업도시이다. 이태리에서 중세의 문화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피렌체는 일명 플로렌스이며, 꽃이라는 뜻이다. 피렌체는 미켈란젤로의 고향이다. 그는 로마에서 활동하였지만, 임종시에 고향에 묻히기를 원하여 제자들이 몰래 로마에서 운구하여 산타크로체 성당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이태리의 북부의 중심, 밀라노는 섬유와 디자인의 도시이다. 그런데 중부의 피렌체는 메리치 가문이 상업과 문화를 발전시켰다. 메리치 가문의 왕에게 군주론이라는 책을 써준 사람이 그 유명한 마키아벨리이다. 단테가 신곡이라는 작품을 쓴 곳이다.(피렌체에서 단테가 신곡을 발표하여 대박을 터트렸다는 아재 개그가 날라온다. ㅎㅎㅎ) 다빈치의 고향도 피렌체이다. 피렌체는 중세에 유명한 사람들을 많이 배출한 도시이다. 가이드로부터 피렌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보니 굉장히 매력적인 도시로 다가왔다.
 
아름다운 문화와 건축물이 굉장히 많았다. 성모 마리아 꽃의 성당, 일명 두오모 성당은 규모가 얼마나 크고 화려한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성당은 뒤편에 돔으로부터 시작하여 앞의 현관을 완성하는 순서로 건축이 된다고 하였다. 두오모 성당은 유럽의 4대성당에 속하는 매우 아름다운 성당이라고 하였다. 성당의 외벽과 내벽에는 수많은 그림과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성당의 돔은 높이가 엄청난데, 그 위에 전망대가 있어서 피렌체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돈을 내고,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고 하였다. 성당 앞쪽에는 후대에 조토라는 건축가가 건축했다는 종탑도 굉장히 높이 솟아 있었다. 현관 앞에는 세례당이 따로 건축이 되어, 단테를 비롯한 유명한 사람들이 이곳 세례당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하였다. 로마사람들은 어디에나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남겼다. 오래 된 건축물이지만 지금도 멀쩡하게 사용하는 것을 보니, 대단한 민족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축구 때문에 이태리가 우리나라와 거리가 멀어진 것이 아쉽기도 하다.
 
J. 열 번째 날, 밀라노(26, )
이제 한국에 귀국하는 날이다. 오전에 밀라노 일정이 취소되었지만, 다행히 계획한 일정을 대부분 소화를 하였다. 이번에 약 열흘 간의 성지순례를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또한 새롭게 깨닫게 되었다. 단순하게 책으로만 보던 내용을 눈으로 확인 한 것이 큰 소득이었다. 백문이 불여일견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목회자로서 성숙해 져야 하겠고,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도로서 팩트에 집중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극적으로 합류하신 이강규 실장은 우리 순례팀에 너무나 큰 힘이 되어주셨다. 영어도 유창하게 잘 하시고, 인원파악도 끝까지 해 주셨다. 젊은 분이 책임있게 우리 순례팀을 인솔해 주었다. 처음부터 성지순례를 기획하신 훈련원 원장님, 또 성지순례를 함께 하신 경동노회 순례팀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성지순례를 전문으로 하는 로뎀 여행사에도 감사를 드린다. 언제나 함께 하시고, 힘들었던 성지순례를 끝까지 도와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린다. Soli Deo Grat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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