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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후기

제목 아르논 골짜기와 맛사다
작성자 김부옥 작성일 2008-11-21 15:31:20
아르논 골짜기와 맛사다

 

 사진 찍은 순서를 보니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국경을 이루고 있는 아르논 골짜기를 지나 우리는 이스라엘을 들어갔다. 고불고불 계속되는 광야를 지나다가 갑자기 시야가 탁 터지는데 글쎄 세상에!! 눈앞의 광경이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어마어마한 거대한 골짜기가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구약에 언급된 그 아르논 골짜기다. 성경을 그냥 읽을 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감이 안 오는데, 세상에 이런 대협곡에서 전투가 벌어졌구나, 두 나라가 서로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고, 도발을 할 때는 즉각 알 수밖에 없다. 말로만 듣던 간단한 지명 하나도 이렇게 거대한데 성경의 역사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말인가.

  고소공포증인 나는 골짜기를 뒤로 하고 서서 벌벌 떨며 사진을 찍었다. 사진에는 그 아득하게 천길 낭떠러지인 골짜기가 나타나지 않는다. 웃고 서있지만 속은 후들거린다.

 

  국경 사이엔 글쎄 사막 속에 댐이라니, 우리나라 같으면 그저 시시한 댐이지만 물이 귀한 사막에 중동에 댐을 만들다니 현대 기술은 정말 대단하다. 사막의 댐 다리 위를 건너가노라니 무슨 초현실의 세계 같다.

 

  드디어 이스라엘 땅, 그러나 삼엄한 경비, 중동의 긴장과 전쟁의 현실이 피부로 와닿는 순간이다.  뜨거운 국경 도로를 걸어서 건물 안에 들어가 짐 검색, 지문 검색, 기다림 또 기다림 많이 친절해진 거라는 이스라엘 여군 그러나 우리에겐 쌀쌀맞게만 느껴지고 가장 작은 체구의 20대 초반의 여자가 가장 핵심 검색을 한다. 어딜 가나 진짜 중요한 일은 작은 사람들이다. 으이구 젊은 사람 몇몇은 남겨서 짐, 지문 검색 다하는데 나도 걸렸다. 가슴이 뛰고 괜히 긴장을 한다. 다 끝나고 이스라엘 들어가자 갑자기 깨끗한 건물에 잘 정돈된 도시, 공업 단지가 나타난다. 조금은 저항감을 느낀다. 서방의 원조로 이렇게 잘사는 이스라엘과 조금 전까지 이집트, 요르단의 가난한 모습의 대비.

 

  이어지는 홍해. 자연은 국경이 없다.

이스라엘이 로마에 마지막 항전을 했다는 맛사다에 도착한다.

이스라엘 신참군인들의 정신교육지라는 이곳.

  

  자신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실제로 온 것을 인정하지 않고(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럴듯하게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척하여 죽인 이스라엘에게, 예수님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고 슬프게 우시던 그대로 최후의 순간이 찾아온다. 종교적으로 드센데다가 계속 말썽이 끊이지 않는 유대지역을 로마는 마침내 응징하기로 한다. 헤롯이 유대에 지어주며 환심을 사려던 화려한 성전을 불태우고 유대인들은 다 흩어버리게 된 것이다. 마지막 남은 결사대 1,000 여명이 이곳 맛사다까지 쫓겨와 3년 동안을 살며 최후 항전을 하다가 로마가 토성을 쌓아 성 진입을 시도하자, 할례 없는 로마인들의 손에 죽지 않겠다며 남자들이 가족들을 다 죽이고 제비를 뽑아 뽑힌 사람이 남자들을 다 죽인 뒤에 자결한, 그래서 어느 남자가 차마 죽이지 못하고 숨긴 여자와 아이가 살아남아 이들의 죽음을 증언한 곳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비장하게 만든 홍보영화에도 전혀 감동이 오지 않는다. 참 맹목적 민족주의가 얼마나 어이없는 희생을 가져오는가, 내가 어려서부터 배우고 자란 민족의 역사와 긍지에 대한 회의가 드는 순간이었다. 역사는 결국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흥하고 망하는 것도 하나님의 이끄심에 달린 것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의로움을 명분으로 어리석은 죽음을 자초하는가. 참된 의와 가치의 기준이 없는 어둠의 역사에 대해 생각해 본다.

  발달된 로마의 온돌, 보일러 시설과 수로 제작기술을 받아들여 여러 편의 시설가지 지어놓고 살았던 유대인들, 그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끄시는 손길에 대한 진정한 인식이 있었다면, 과거의 선민으로서의 역사에 대한 집착이 아닌 새롭게 열리는 역사의 지평에 대한 개안(開眼)이 되었더라면 오히려 이미 오신 메시아를 알리는 일에 헌신하여 바울처럼 민족을 초월한 역사적인 사명을 이루는 데에 그들의 삶을 드릴 수 있었을 텐데. 아무리 선택받지 못한 자의 한계라고 하지만 이렇게 극명한 대조를 이룬단 말인가. 이걸 이스라엘은 역사의 모범으로 삼아 정신교육을 하고 있다니 제자리 걸음의 역사인식은 세상의 역사가 가고 있는 흐름을 알지 못하고 어리석은 반복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물안 개구리의 형상이 아니고 무엇인가.

  세계에 던질 핵폭탄과 같은 말씀의 가슴 벅찬 사명을 안고 로마의 죄수로 배를 타던 바울의 생애. 그의 가슴 속엔 새로이 열리는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너무나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리라. 같은 유대인들이 기고 있는 시대에 그는 일어섰다. 가라~! 저 이방인들에게로!! 이방인들이라구요? 그래 그것이 그분의 뜻이다. 너희들만의 메시야가 아니다. 나는 이제 세상 만방의 하나님이다. 그 작은 물줄기는 오늘날 엄청난 파도가 되어 세상을 뒤덮고 주님의 손길을 증거하고 있다.

  관광지가 된 맛사다의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며, 인간의 자기학대가 다른 사람에게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된다고 속이는 사단의 술수가 오늘날 영화를 비롯한 모든 예술분야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음을 생각한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문화침투에 노출되어 자극과 파괴가 오락과 예술의 필수 요소인 것처럼 무감각해져서는 안 되는 것을, 그러기 위해서는 구정물에 한 방울 맑은 물이라도 희석을 시키는 심정으로 그리스도인의 빛이, 향기가 사회에 소문이 나게 하라셨던 말씀, 사람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던 말씀이 오늘에도 실천되어야 할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좋은 것들을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모두 핀트가, 초점이 맞춰져서, 우리 후세대들에게 이러한 역사를 이끌어오신 하나님, 너무나 멋진 연출가이신 하나님을 가르치는 일에 우리의 영화가, 예술이, 사용되어야 하고 심지어는 컴퓨터 게임도 성경의 전투를 실제 체험하도록 개발하는 일을 우리 후세대가 해야 할 것이다. 무조건 하지 말라 해서 교회에서는 안하는 척하다가 일주일 내내 그러한 문화에 젖어 있도록 방치하는 무능한 어른들이 안 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순교신앙에 대한 인식도 바르게 교정되어야 함을 생각한다.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기보다 오늘날이 더 바르게 살기 어려운 시대다. 물리적인 폭력이 물론 사람을 위축되게 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보다 더 교묘하게 사단은 우리의 신앙을 어렵게 하고 있다. 육신적 어려움을 견디는 것이 순교라고 맹목적으로 미화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어려움이 없을 때, 우린 아무 잘못 없이 잘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 매일 아무 생각 없이 텔레비전을 보고 안 믿는 사람들과 똑같이 쇼핑하고, 먹고. 구별된 모습 없이 살게 만들어져 있다. 차라리 어떤 어려움이 오면 우린 긴장해서 기도한다. 그래서 고난을 축복이라고 한다. 하나님과 관계를 가깝게 하는.

  과거의 선비들이 자연 속에 숨어사는 것만이 숨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와 벼슬하고 살면서도 작은 벼슬에 자신을 숨기고 사는 대은(大隱)이라는 것을 했다고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과거의 수도승처럼, 현재의 목사님처럼 가시적 수도생활을 하는 것이 참 헌신이라고 생각하기 쉽고 가시적 은혜생활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진정한 신앙은 삶속에서 자신을 주고 예수처럼 사는 것, 손해 보며 불쌍히 여기며 순간순간 순교하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목사님의 칼럼에만 나올 이야기가 아니다.

 

  차라리 어느 순간 목숨을 내놓는 순교가 쉬울지 모른다.

오늘 내 자존심을 밟는 사람을 용납하고, 교회 안에서 날 상처주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그것조차도 못하는 나. 이런 나를 쳐서 복종시키는 것, 그것이 매일 죽는 순교이다.

존심 상해하는 난 죽었습니다. 이를 가는 나도 죽었습니다.

다 이루셨다고 그러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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